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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우리가족 단톡방에 사진묶음이 올라왔다.

주말에도 쉬지 못하는 아빠를 위로하려는 건지, 기념하려는건지 모르는 즉석떡복이 사진이다.

집에 있는 두 딸을위해 애들 엄마가 즉석에서 해준 떡복이. 내 예상이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 국물떡복이다. 

집사람은 국물이 안나오게 요리할줄을 모른다. 뭘해도 국물을 넉넉하게 잡기때문에 저위의 떡복이도 남들이보면 오뎅탕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다시한번 말씀드린다. 저건 탕이아니고 떡복이다.


15년전, 그러니까 2004년 6월을 나는 기억한다.

한창 IMF때 제대한 나는 다니던 학교를 자퇴하고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건사하기위해 "교차로"에 나온 구인광고란 3곳 중에 마지막에 있는 가스배달을 어렵사리 들어가서 닥치는대로 일을 하던시기이다. 임시방편으로 시작한 가스배달일이 익숙해지면서 난 집에있던 빚을 갚을수 있었고, 조그마한 단칸방 월세에서 15평빌라 전세를 구할수있었다. 그때쯤부터 난 세상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조금 생겼다. 

2004년 초여름, 난 늘 하던대로 거래처 식당에 가스를 배달하고 얼음물 한잔 얻어먹고자 찾아간 식당 카운터에서 한순간 넑을 잃고말았다. 화사하고 가녀린 어린 아가씨가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목젖을 내보이며 입을 하늘로 향하고 장떡을 먹고있는 것이다. 아니 막 떡이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 시점부터 보게 돼었다. 장떡을 입에 가득 물고 날 발견한 아가씨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쌔빨개진 얼굴을 숙이기에 급급했고, 그런 아가씨를 보는 나는 미친듯이 뛰는 놀란 심장소리가 아가씨에게 들릴까봐 어쩔줄 몰라했던 시절... 전통한식음식점에 알바하러 온,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장떡을 먹다 놀란 토끼눈으로 나를 처다보던 어린 아가씨가 내가 기억하는 첫인상이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소중한 딸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귀하게 자란 어린 아가씨가 결혼을 했다고 해서 할 수 있는건 별로 없다. 아니 할수는 있다. 잘 하지 못해서 문제가 돼는건 아니다. 

아가씨가 내게 처음으로 해준 음식은 "라면"이다. 물을 적당량 넣고 끓인다음 면 넣고 스프넣으면 돼는 라면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 받아본 라면은 라면이라기 보다는 라면국 이라고 해야 맞을것 같다. 처음 물량을 조절할때보고 난 2개를 끓이는줄 알았는데 하나를 끓였다. 이건 라면국이나 라면 탕이라고 해야할 것을 내게 주었다.

내게 맛있는 요리를 해줄거라면서 서점에서 거금 45,000원을 들여 책을 샀다. 총 108가지의 음식을 요리하는 방법이 들어있는 요리백과. 난 그 여러가지 요리중 딱 1가지를 맛볼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책은 냄비받침이 돼었다. 아마 지금 찾아봐도 어딘가에 있을것이다.

어리고 여리던 아가씨는 시간이 흘려 딸 둘을 보게 돼었고, 아가씨에서 아줌마로 변모를 하게돼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곳잘 여러가지 음식을 뚝딱 해낸다.

이런 탕같이 생긴 떡복이도 하고,

오뎅탕도 이젠 제법 잘한다. 예전같았으면 냄비가득 국물에 오뎅이 둥둥 떠다녔을텐데...


늘 엄마가 해주던 밥을 먹고, 아빠가 사주는 생일선물을 기대하던 어린 아가씨가 어느새 엄마가 되어있다. 

아직도 아빠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나를 아빠로 만들어주었고, 딴짓못하게 늘 옆에서 내 자리를 만들어주고있다.


부부를 흔히 반려자라고 한다. 쉽게말해 또다른 반쪽짜리 나인 셈이다. 이제 나는 혼자서는 완벽한 나 가 될 수 없다. 

이 사람이 있어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고...

이 사람이 있어서 난 여기 살아 갈 수 있다.


반복된 삶속에 싸우기도 많이 하고 상처를 주는데 망설임이 없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 내 옆자리를 채워주고 내 부족한 것들을 메워주는 내게 너무 감사한 당신.


사랑한다는 말보다 감사하다는 말로 이 내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로 때우기엔 너무 큰 것들을 주었기에 감히 말하고 싶다.


"당신께 감사합니다.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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